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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3: 4세기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상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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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3: 4세기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상황

새샘 2023. 3. 31. 22:55

그리스도교는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게 되자 교리, 조직, 성향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4세기 말의 그리스도교는 불과 100년 전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재위 284~305)와 갈레리우스 Galerius(재위 305~311) 치세의 박해받던 그리스도교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종교가 되어 있었다.

 

 

○교리 논쟁

 

아리우스(왼쪽)와 아타나시우스(사진 출처-위키백과)

 

그리스도교의 승리가 초래한 한 가지 결과는 격렬한 교리 논쟁이 불타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이전에도 교리 문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미미한 소수파 종교에 머물러 있는 한 이런 의견 불일치는 정치적·사회적 중요성의 거의 갖지 못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재위 306~337)가 황제에 오른 뒤 이런 불일치는 주교들과 그 반대파 사이에 정치적 논쟁(심지어는 폭동)까지 초래할 수 있었고 교회를 지지하는 황제의 권위를 훼손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교도인 황제가 직접 논쟁에 적극 개입해서라도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교리 논쟁은 삼위일체 trinity의 본질을 둘러싸고 아리우스파(아리우스주의) Arianism와 아타나시우스파(아타나시우스주의) Athanasian 사이에 벌어졌다.

아리우스파는 아리우스 Arius라는 사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신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들은 성자인 예수가 성부에 의해 시간 속에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성자는 성부와 함께 영존할 수도 없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갖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성 아타나시우스 Saint Athanasius의 추종자들은 정반대로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성자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신이었다.

그러므로 성부聖父 the Father·성자聖子 the Son·성령聖靈 the Holy Spirit은 모두가 동등하며 동일한 본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오랜 싸움 끝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그 후로도 200년 동안 계속해서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정통 orthodoxy―그리스어로 '올바른 가르침'이란 뜻―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강조는 4세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였다.

그것은 향후 교회사 전 시기에 영향을 미쳤다.

초기부터 그리스도교는 구원을 위한 올바른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주장한 믿음은 처음에는 대단히 단순했다.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죄 짓기를 삼가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식이었다.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미 상당히 복잡해져 있었다.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은 그들의 믿음이 가장 엄격한 철학적 검증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리스도교를 참된 철학으로 제시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학을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전제와 양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사상에 수많은 다양한 학파가 있었듯이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해서도 수많은 다양한 해석이 등장했다.

 

이런 논쟁을 해결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논쟁에는 교리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지역적·정치적 차이도 개입되었다.

논쟁은 까다로운 권위 문제까지 야기했다.

2세기와 3세기의 교리 논쟁은 지방 공의회에서 주교들 간의 토론으로 해결되었지만, 논쟁에서 진 쪽이 평결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지라도 공의회는 결정 사항을 받아들이게 할 강제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관계가 한층 커졌다.

4세기의 교리 논쟁은 종종 정치적 의미를 가졌고 황제 자신도 여기에 관련되었다.

그 결과 로마 국가는 점점 교회 정치에 휘말려들었는데, 특히 제국 동반부가 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公議會 Council of Nicaea―아리우스주의를 정죄定罪(죄가 있다고 단정)했다―를 소집하고 주관함으로써 국가가 종교에 개입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계승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스도교도 황제들은 공의회를 주관했고 황제가 지상에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방향을 결정할 자격을 갖는) 그리스도의 대리인 역할을 맡는다고 주장했다.

어떤 황제는 군대를 파견해 황제가 결정한 정통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리스도교 집단을 박해하기도 했다.

그러한 결정을 거부한 자들은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채 법적 처벌과 교회의 징계를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Augustus(재위 서기전 27~서기 14) 이래 로마 황제들은 로마인들의 시민적 의식을 주관하는 종교 당국자로서 행동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계승자들은 이제 이 전통적인 황제의 역할이 그리스도교화된 로마 제국의 새로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교회 조직의 성장

 

서기 1~5세기의 그리스도교의 성장
예수의 생애 서기전 4년경~서기 30년경
바울의 전도 여행 46~62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69~70년
유대인 예루살렘에서 추방 132~135년
콘스탄티누스, 최초의 그리스도교 황제 되다 312년
니케아 공의회 325
그리스도교가 로마 국교 되다 392
교리 논쟁 시기 4~5세기

 

4세기에 이루어진 종교와 황제권의 결속은 교회 내부 조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보았듯이 교회의 직책은 적어도 2세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4세기의 교회는 한층 명확히 규정된 계서제階序制(계급에 따라 서열을 결정하는 제도)적 조직이 되어 있었다.

도시에 자리 잡은 주교(흔히 유력 지방 가문 출신이었다)는 인근 지역의 사제와 부제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주교 사이에도 차등적 위계가 나타났다.

대도시를 지배하는 주교는 대감독 metropolitan―오늘날의 대주교 archbishop―으로 불렸는데, 그는 해당 속주 전체의 사제들에 대해 권위를 가졌다.

4세기에는 그보다 높은 지위인 총대주교 patriarch라는 직위가 등장했고, 그는 로마,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등 유서 깊고 규모가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다스릴 주교들을 임명했다.

그 결과 400년에 이르러 그리스도교 성직자는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 등의 명확한 계서제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여성은 이 계서제에서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런 발전의 절정은 로마 주교의 수위권首位權 primacy(모든 주교 가운데 제1의 권한 곧 교황이 가진 권한) 또는 교황권敎皇權 papacy(가톨릭교의 최고위 성직자가 갖는 권리)의 등장이었다.

로마 주교가 교회의 다른 총대주교들에 대해 수위권을 주장한 근거는 여러 가지였다.

로마 시는 사도 베드로 Peter the Apostle와 사도 바울 Paul the Apostle이 순교한 곳으로서 신도들의 각별한 존중을 받고 있었다.

베드로는 로마의 첫 번째 주교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 ≪신약성서≫는 예수가 베드로를 지상에서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그리스도교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고 말했다(마태복음서 16:18-19).

그 후의 로마 주교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것과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로마 주교들은 교회 안에서 다른 주교들에 비해 세속적인 이점을 누렸다.

동반부 주교들과 달리 330년 이후 로마 주교들의 주변에는 황제가 거의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보다 훨씬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한편 동반부 황제의 입장에서는, 제국 서반부에서 황제권과 비슷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황의 서로마 주교들에 대한 수위권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 편리했다.

아마도 이것이 445년 황제가 내린 칙령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Valentinianus III(재위 425~445)모든 서로마 주교들이 교황의 사법권에 복종할 것을 명했다.

몇 백 년 세월이 흐른 뒤 이 칙령은 교황이 서유럽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교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무시했다.

대부분의 동방 주교들은 교황의 전체 교회에 대한 수위권 주장을 말도 안 되는 파렴치로 간주했고, 서유럽 주교들도 교황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와 5세기에 로마 주교의 위신은 커졌다.

교황은 아직 군주제적 지배자는 아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교황이 주장한 수위권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4세기에 이루어진 교회 조직·행정의 효율성 증대는 교회가 로마 세계를 지배하는 데, 그리고 신자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데 기여했다.

주교 중심의 행정 조직은 5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궁극적으로 붕괴하게 되면서 특히 서로마에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혼돈이 깊어가면서 서로마 주교들은 도시 정부의 많은 기능을 떠맡았고 로마 지배의 흔적을 보존했다.

그러므로 야만인 군대가 당도했을 때 그들이 협상 대상으로 만난 상대는 대개 지방 주교들이었다.

 

 

○수도원 제도의 확산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는 교회가 점점 더 많은 행정 책임을 떠맡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종교와 정치는 로마 제국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교도가 보기에 새로운 세계는 예수와 사도의 소박한 신앙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수도원修道院 monastery 제도는 그러한 환멸에서 파생된 결과물이었다.

현대인은 수도사라고 하면 명상과 기도의 생활에 헌신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제집단을 연상한다.

그러나 최초의 수도사들은 사제가 아닌 평신도였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고독하게 살았으며 질서정연한 기도와 예배 생활보다는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삶을 추구했다.

 

수도원 제도는 3세기에 그 시대의 고뇌에 대한 대응으로서 등장했지만,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지배적인 운동이 된 것은 4세기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수도원 제도가 호소력을 지닌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가 끝나자 때로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순교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수도원 제도가 4세기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이라는 사실이다.

세속적 유혹을 피하고자 했던 그리스도교도는 사막과 숲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황제의 종교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든 남녀가 영위하던 안락한 삶과는 동떨어진 금욕적 삶을 실천했다.

사교 클럽을 지향하는 그리스도교도로 가득 찬 교회 안에서, 일부 순수한 신자들은 수도원이야말로 구원을 위한 유일한 확실한 방도라고 간주했다.

 

수도 생활은 제국 동반부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그곳에서 4세기에 급속히 퍼졌다.

초기의 수도사는 대부분 은자로 살면서 극단적인 자기부정과 겸손의 삶을 실천했다.

어떤 사람은 소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살았고, 또 어떤 사람은 작은 우리 속에 그스로 갇혀 살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목에 무거운 물건을 매단 채 생활하기도 했다.

키리아쿠스 Cyriacus라는 수도사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두루미처럼 한 발로 여러 시간 서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수도사인 성 시메온 스틸리테스 St. Simeon Stylites는 37년 동안이나 높은 돌기둥 위에 살면서 지학적인 고행을 했고 그동안 돌기둥 아래로 군중이 몰려와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구더기들'에게 경배를 바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사들은 좀 더 조직적이고 규칙적인 접근방식이 수도원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반부에서 새롭고 공동체적인 수도 생활을 창도唱導(어떤 일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부르짖어 사람들을 이끌어 나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 바실리우스 St. Basilius(영어 Basil) the Great(330경~379)였다.

바실리우스는 수도사들이 지나치게 금식을 하거나 육체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금하는 지침을 제시했다.

대신 그는 수도사들이 유익한 노동에 종사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하도록 했다.

그는 청빈과 겸손의 의무를 실천할 것, 매일 많은 침묵 속에서 종교적 명상을 할 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그는 수도사들이 가능한 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살 것을 촉구했다.

그 결과 바실리우스 수도회는 수도원 바깥세상의 교회라는 점에서 서유럽의 베네딕투스 Benedictus 수도회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유럽의 초기 수도 생활은 제국 동반부에서처럼 신속하게 확산되지 않았다.

6세기에 들어서 누르시아 Nursia의 성 베네딕투스 St. Benedictus(영어 St. Benedict)(480~547)가 유명한 라틴 수도 계율을 작성함으로써 비로소 서유럽에서 수도원 제도가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그 무렵까지만 해도 수도원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베네딕투스 수도원 Benedictine Monastery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 후 8세기에 접어들어서야 베네딕투스가 설립한 수도회가 서유럽 수도원 제도의 중심적인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13세기부터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다시 한 번 여러 수도회와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그 기원만을 다루기로 하고,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베네딕투스 계율은 상당 부분 '대가大家의 계율' Regula magistri'이라는 기존의 한층 더 엄격했던 라틴 문서를 본뜬 것이다.

하지만 베네딕투스는 기존의 라틴 문서와는 매우 다른 문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초심자를 위한 단순한 계율'이라고 이름 붙였듯이, 베네딕투스 계율은 간결하고 유연하며 온건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율은 기도, 학습, 공동 예배 등의 자세한 일과 시간표를 정해놓았다.

수도사가 어떻게 공동생활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을 정한 것이다.

이를테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소박한 음식을 충분히 먹고서 적은 양의 포도주가 허용되었고, 육류는 병자와 특별한 경우에만 먹을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의 노동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베네딕투스에 따르면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었기 때문에 육체노동이 장려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공부와 명상의 시간도 확보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서 베네딕투스는 많은 부분을 개별 수도원장의 재량에 맡겼다.

수도원장은 수도원의 지도자로서 휘하의 모든 수도사는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긴 수습 기간을 거쳐야만 했다.

그 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수도사로서 최종적인 평생 서약을 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때로 베네딕투스 서약이 '청빈, 순결, 복종'을 요구한다고 압축해서 표현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한 미덕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베네딕투스 수도사가 헌신해야 할 계율의 본질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네딕투스 수도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은 미덕은 '착실함, 인내심, 수도생활에의 헌신' 등이었다.

수도 생활의 목적이 대개 그러하듯이 계율의 목적 또한 수도사로 하여금 신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계율은 이런 변화가 달성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여성, 결혼, 몸에 대한 태도의 변화

 

4세기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광범한 변화는 여성의 지위에 각별한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보았듯이 초대 교회에서 여성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 바울(바울로) St. Paulus(영어 Paul)(사도 바울 Paul the Apostle)은 선교 여행 때 유력한 여성들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그는 <갈라디아인에게 쓴 편지>(3:28)에서 그리스도교도 사이에는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영적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신 앞에서는 동등했다.

상층계급 여성은 로마 등지의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초대 교회에서는 수많은 여성 순교자가 나왔고, 일부 교회에서 여성은 교사, 예언자, 지방 집회의 관리자 등을 맡았다.

여성의 역할은 초대 교회에서 분명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신역성서≫에서 표출된 다양한 의견은 초대 교회가 결코 획일적인 가부장제를 지지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3세기와 4세기에는 금욕주의가 성장하면서 여성을 '육체적' 존재로 비하하는 경향이 노골화되었다.

당연히 수도사는 여성과의 접촉을 철저히 피했고, 그것이 사막과 숲으로 도망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스도교 성직자들 또한 고대 말기 세계를 특징지었던 청교도적인 성적·사회적 태도에 휩쓸렸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 중 여러 명이 결혼생활을 했고 초대 교회에서는 사제와 주교가 기혼자라 해도 얼마든지 용인되었다.

실제로 로마 세계에서 결혼은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지표였다.

결혼하지 않은 남성은 의혹의 시선을 받곤 했다.

오직 철학자들만 관행상 결혼을 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치는 동안 사제와 주교도 철학자들처럼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이미 결혼했다면 아내와 성관계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이 발전되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동정童貞 즉 순결은 교회 안에서 지고의 영적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결혼은 평신도에게만 허용되었지만 그것은 성적 금욕의 의지를 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차선책일 뿐이었다.

성 히에로니무스 St. Hieronymus는 이런 관점을 지극히 세속적으로 표현했다.

즉, 동정은 밀, 결혼은 보리, 혼외 성관계는 소똥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소똥을 먹을 수 없기에 신은 보리를 허락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음식은 밀이었다.

결혼의 목적은 간음을 방지하고 자녀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원칙적으로 결혼을 찬양했다.

더 많은 동정의 남녀를 세상에 보내주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천성적으로 남성보다 음란하다고 간주되었는데, 이런 성적 폄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태도에 터무니없는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또는 결혼을 동정에 대한 바람직하지 않은 대안으로 격하함으로써,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수도원적 은둔을 찬양함으로써, 4세기의 그리스도교는 몸과 국가에 대한 초기 로마의 관점에서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로마인은 시민의 몸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 위한 존재로 여겼다.

남성은 병사이지 아버지로, 여성은 어머니이자 아내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교도는 그의 몸이 국가가 아닌 신에 속한 것이며, 신을 온전히 섬긴다는 것은 더 이상 자녀 출산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태도 변화로서, 고대 세계가 고대 말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소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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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