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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1: 서론 및 절대주의의 매력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1: 서론 및 절대주의의 매력
새샘 2025. 1. 25. 08:11
15장 서론
(잉글랜드 England에서 왕정이 회복되고 프랑스 France에서 루이 14세의 통치가 시작된) 1660년에서 (프랑스 혁명 French Revolution이 일어난) 1789년까지의 시기를 전통적으로 절대주의絶對主義 시대 the Age of Absolutism라고 일컫는다.
절대주의란 통치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토 안에서 완전한 통치권을 요구하도록 고취시키는 정치이론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주의자들에게 완전한 통치권이란 통치자가 다른 어떤 통치 당국의 공식 승인을 받을 필요 없이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사법권을 행사하며, 관료제를 만들어 이를 지휘하고 전쟁을 선포하며,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때때로 절대 권능의 주장은 자신의 가정에 대한 가장의 절대 권위와 동일한 신성한 권리로 통치자가 자신의 영토를 통치한다는 주장으로 뒷받침되었다.
이른바 유럽 Europe에서 '철의 세기 Iron century'의 혼돈이 지난 이후 많은 유럽인 Europian은 그러한 절대적이고 '가부장적' 통치자의 통치권을 강화함으로써 유럽인의 생활에 질서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 믿게 되었다.
절대주의 시대는 또한 제국帝國 Empire의 시대였다.
1660년에 이르러 프랑스, 에스파냐 España, 포르투갈 Potugal, 잉글랜드, 네덜란드 Netherlands는 모두 아메리카 America와 아시아 Asia에 중요한 식민지들을 세웠다.
서로 경쟁하는 이들 식민지 열강 사이의 다툼은 격렬했고 자존심을 내포한 것이었다.
17세기 말 유럽의 전쟁은 거의 항상 식민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중엽 전 세계적 무역이 유럽 경제에서 더욱더 큰 역할을 떠맡게 되자 유럽에서 식민지 문제와 제국주의적 충돌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절대주의는 유럽 여러 나라가 이 시기 동안에 어떤 통치 방법을 모색하는가에 따른 정치 이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Scotland, 네덜란드, 스위스 Switzerland, 베네치아 Venezia, 스웨덴 Sweden, 폴란드 Poland-리투아니아 Lithuania는 모두 제한군주국이거나 공화국이었지만, 러시아 Russia에서는 차르 Tsar 체제에 기반한 극단적인 전제 정치가 대두하고 있었다.
차르 체제란 서유럽의 절대 군주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백성의 삶과 재산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조차 절대주의는 실제로는 이론처럼 결코 그렇게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가장 절대주의적인 군주들조차도 신민(그리고 특히 귀족)이 군주의 정책에 최소한 암묵적으로라도 동의할 용의가 있는 한에서만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심각한 반대가 있을 때에는 절대군주라 하더라도 한 발 물러서야만 했다.
그리고 1789년 공공연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절대주의의 전체 구조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절대주의의 매력과 정당화
절대주의가 내세운 안정·번영·질서에 대한 약속은 앞선 '철의 세기(1540~1660)'에 보여준 혼란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이것은 특히 프랑스의 전형적인 절대군주 루이 14세 Louis XIV(재위 1643~1715)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루리 14세가 미성년자였던 시절의 정치적 혼란은 어린 왕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1651년 어느 날 밤 파리 Paris 군중이 자신의 침실에 침입했을 때 루이는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인화시킨 프랑스라는 나라의 권위에 대한 매우 불쾌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파리 고등법원을 통한 국왕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귀족계급 사이의 시시한 언쟁을 목격한 루이는 프랑스가 강력한 유럽 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무런 제약 없이 단호하게 통치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절대군주들은 국가의 군대 지휘권, 법률 체계에 대한 통제권, 임의로 국가의 재원을 징수하고 지출하기 위한 권리 등을 자기 수중에 모으려고 했다.
또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군주 자신에게 직접 충성을 다하는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의 창출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관료제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이전에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를 방해해왔던 특권을 지닌 특별한 이해관계 세력의 약화라는 원대한 절대주의 목적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법적으로 특권을 지닌 귀족과 성직자 계급, 준準자치적 지역의 정치적 권한, 그리고 고등법원·의회·신분회(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영어 Estates General) 같은 독자적 생각을 지닌 대의기구의 암묵적 요구 등은 모두 절대군주가 이루고자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의 장애물이었다.
절대주의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야심찬 절대군주들이 그러한 기관이나 제도를 자신에게 복종시키고자 한 역사였다.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국가에서 교회의 독립적 권력은 이미 절대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국가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 Roman Catholic Church가 국교로 남아 있던 프랑스·에스파냐·오스트리아 Austria에서 절대군주들은 영토 내 교회와 성직자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군주들은 15세기와 16세기 동안 교황으로부터 정교협약政敎協約 Concordatum을 이끌어냈지만, 교회에 대한 권한을 군주정이 장악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1759년에서 1788년까지 에스파냐를 통치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카를로스 3세 Carlos III조차도 성직 임명권과 자신이 승인하지 않은 에스파냐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교황의 교서라도 무효화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교황과의 정교 협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하지만 국왕의 절대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잠재적 반대자는 교회가 아니라 귀족이었다.
군주들은 이들의 위협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귀족들을 자신의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 Palace of Versailles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들이 사회적 위신을 높여주는 한편 지방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박탈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 Peter the Great(Peter I)(재위 1682~1725)는 자기 휘하의 모든 귀족이 종신 공직을 맡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18세기 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재위 1762~1796)는 러시아 귀족에세 방대한 영지와 (세금 면제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경제적 특권을 주는 대가로 그들이 실질적으로 국가의 행정권과 정치권력을 여황제의 손에 넘겨주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프로이센 Prussia에서는 에스파냐·프랑스·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이 군대의 지휘관이나 참모가 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Joseph II(재위 1765~1790)는 귀족의 면세 특권을 부정하고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별을 흐리게 만들면서 화해보다는 대결의 정책을 취했다.
군주와 귀족 사이의 투쟁은 종종 지방과 중앙 정부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군주는 상위 귀족을 자신의 궁전에 살도록 요구함으로써 귀족이 주도하는 지방 기관의 자치권을 잠식하고자 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카스티야 Castilla에 근거를 둔 군주정이 아라곤 Aragón(영어 Aragon)과 카탈루냐 Cataluña(영어 Catalonia)의 독립성이 강한 귀족들과 투쟁을 벌였다.
프로이센의 통치자들은 '자유' 도시 주민에 대한 경찰권과 과세권을 주장함으로써 이들 도시를 지배하고자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 Habsburg Empire의 황제들은 비록 성공하지만 못했지만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고 있던 헝가리 Hungary 귀족계급을 억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왕권과 귀족계급 사이의 대치 관계는 장기적으로 보아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의 가장 유능한 절대군주들은 휘하의 귀족과 잠정적인 협정(모두스 비벤디 modus vevendi)을 맺었다.
이에 따라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이 국왕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18세기 '구체제舊體制' 즉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 기간 동안 왕과 귀족은 갈등 관계라기보다는 더욱 빈번하게 협조의 양상을 띠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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