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09. 5/9 구례 연곡사 본문

여행기-국내

2009. 5/9 구례 연곡사

새샘 2009. 5. 15. 14:01

대전대학교 박물관의 <문화유산탐방>은 5월 9일 지리산 <쌍계사><연곡사> 탐방 프로그램이었다.

하동 <쌍계사> 탐방기에 이어 구례 <연곡사> 탐방기를 쓴다.

 

14:30 하동 쌍계사 출발

 

15:00 구례 연곡사 주차장 도착. 주차장의 지리산 피아골 안내소를 지나 연곡사로 향하는 길 양쪽은 홍단풍 가로수길로  꾸며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호젓한 산사 정취가 흠뻑 묻어난다.

 

연곡사는 전남 구례군 토지만 내동리 지리산에 자리한 대한불계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다. 연곡사 일주문 옆의 지리연곡사 안내판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인 543년 화엄사의 수장이었던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나, 창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찾을 수 없고, 남아 있는 유물로 볼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에 걸쳐 가장 번성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연곡사燕谷寺란 이름은 연기조사가 세상을 피해 살기 위한 곳을 찾다 현재의 법당자리에 연못이 있어 유심히 바라보던 중 연못 한가운데에서 소용돌이가 치더니 제비燕 한 마리가 날아가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었다고 해서 붙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왜란때 불타버린 연곡사를 소요태능이 중창했고, 1745년 밤나무로 만든 왕가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1895년 밤나무의 남용으로 신주목 봉납에 큰 어려움을 겪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버림으로써 절이 폐망되었다. 1907년 호남의병의 활동본거지로 사용되어 왜병에게 방화를 당했다. 1924년 심우암을 창건했으나 한국전쟁때 피아골 전투를 다시 폐사가 되었고, 그 뒤 1965년 소규모 대웅전이 요사를 겸해 세워지면서 절은 다시 법등을 잇게 되었다. 그 후 활발한 중건 불사가 이루어진 끝에 지금의 고즈녁하고 아담한 불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주문 왼쪽에 사찰 안내도와 함께 '지리연곡사'에 대한 설명판이 붙어 있다. 안내도를 봐도 2개의 불전만 있을 정도로 소박하다. 그래서 분방하지 않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 호젓한 산사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정말 맘에 드는 사찰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연곡사智異山燕谷寺'이란 현판이 붙은 일주문이 계단 위에 세워져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오른쪽으로 연못이 보인다. 아마도 이 연못은 전해오는 연곡사 창건얘기에 따라 파 놓은 듯 하다.

 

다시 2개의 계단을 올라 대적광전에 이르는데, 길 양쪽의 매실나무에는 청매실이 대롱대롱 많이도 달려 있다.

 

사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대적광전大寂光殿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으로서 대광명전, 화엄전, 비로전이라고도 불린다. 대적광전이란 이름은 비로자나불이 있는 연화장 세계가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하여 모든 산란한 마음을 없앤 끝에 도달한 몸에 괴로움이 벗는 편안한 상태인 대적정大寂定의 세계 즉 열반의 세계라 하여 붙은 것이다. 대적광전은 1983년에 지어진 불전이다.

 

대적광전에는 본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여 한가운데에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셔 이 세 부처가 삼위일체를 이룬 조화의 세계, 즉 연화장 세계를 재현한다우리나라의 선종사찰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협시보살로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덕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모신 곳이 많다. 비로자나불은 수인 즉 손모양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쥔 지권인으로서, 이것은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연곡사에 있는 3개의 부도를 구경하기 위해 대적광전을 지나 오름길을 오른다. 대적광전에서 북동쪽으로 50m 지점에 높이 3.5m의 동부도東浮屠가 있다. 부도는 이름난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돌탑 즉 묘탑을 말한다. 동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장식과 조각이 정교한 작품으로서 국보 제53호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827~898)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팔각원당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으며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쌓은 일반형이라고 한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

 

동부도 앞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동부도비東浮屠碑는 높이 1.2m에 달하며 보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는 비석이다. 현재 비문을 새긴 비석의 주된 부분인 비신碑身은 없고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部와 뿔 없는 용 모양을 새긴 형상인 이수만이 남아 있다.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있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귀부는 지대석과 함께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다. 똑 바로 세우고 있는 거북머리龜頭는 떨어져 나간 것ㅇ르 다시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동부도비는 동부도와 관련된 것으로 묘탑 조성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부도에서 북쪽으로 150m 거리에 2번째 부도인 북부도北浮屠가 서 있다. 높이 3.06m이고 국보 제54호다. 네모꼴의 지대석 위에 구름 무늬가 조각된 8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무늬를 돌려 가운데돌(중대석中臺石)을 받치고 있다. 넓은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물의 양식을 따라 정성들여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 나도록 조각작품을 새겼고, 아랫면에는 비천을 조각하였다. 동부도를 본따 약간 후에 만들어진 돌탑으로 역시 고려초기의 작품이며 돌탑 주인공은 모른다.

 

연곡사 서북쪽에 위치한 높이 3.08m 보물 제154호 묘탑이 서부도西浮屠로서 탑신에 새겨진 명문에 소요대사의 부도라고 밝히고 있다. 8각원당의 기본형으로 조선 효종원년인 1650년에 건립된 것이다. 동부도와 북부도에 비해 그 조형미가 약간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절 경내 서북쪽에 위치한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는 높이 2.05m로 보물 제152호. 옛 탁본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79년에 건립되었다. 동부도비와 같이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현각선사비명'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귀부는 파손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1970년에 복원한 것이다.

 

일주문을 나가기 전 왼쪽에 '산방다원山房茶院'이라는 이름의 호젓한 다원이 한 채 서 있고, 다원 앞 나무간판에는 '날마다 좋은날'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들러서 차맛을 보고 싶었지만...

 

일주문 앞길을 따라 계곡물이 졸졸 시원스런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연곡사는 쌍계사보다 규모는 초라할 정도였지만 사찰로서의 품격과 소장문화재는 쌍계사를 능가하였다.

주차장에서 연곡사는 보이지 않는다. 연곡사를 품고 있는 뒷산과 뒷산에서 연결되어 앞으로 뻗어 있는 산들을 쳐다보면서 쌍계사와 연곡사 답사를 정리해 본다.

 

2009. 5.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