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소당 이재관 "오수초족도" 본문

글과 그림

소당 이재관 "오수초족도"

새샘 2012. 5. 24. 11:36

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라네

<이재관, 오수초족도, 조선 19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담채, 122×56㎝, 삼성미술관 리움>

 

나른한 초여름 오후 하늘 사위가 고즈넉한 날, 나이 지긋한 선비 한 분이 깜빡 낮잠이 들었다. 걷은 휘장 사이로 살펴보니 평상 위에 놓인 책 더미에 윗몸을 기대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걸친 채 그대로 오수삼매午睡三昧에 빠졌다. 아마도 책을 읽다가 잠깐 무거운 눈꺼풀을 쉰다는 게, 그만 "새 소리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에 낮잠이 막 깊이 든(금성상하禽聲上下 오수초족午睡初足)" 모양이다. 이곳은 깊은 산 속 시골집이다. 그것은 마당에 낀 푸른 이끼를 보아 짐작이 되니 여간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것이다. 고요함과 한가로움, 느긋함과 편안함이 화면에 스며든다.

 

<오수초족도午睡初足圖>는 송나라의 당경唐庚(1071~1121)이란 사람의 글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 해는 소년처럼 길기고 하다 / 내 집이 깊은 산 속에 있어 / 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 /

푸른 이끼는 섬돌에 차오르고 / 떨어진 꽃이파리 길바닥에 가득하네 / 문에는 두드리는 소리 없고 / 솔 그늘은 들쭉날쭉하니 /

새 소리 오르내릴 제 / 낮잠이 막 깊이 드네."

 

서안 가득 쌓인 책을 보니 지난 세월 선비가 공부하 내력을 알 만한데, 저이는 분분한 세상사 접어두고 애써 한적한 곳에서 맛을 찾았다. 작은 기와집은 늙은 소나무와 석벽 사이에 자리했다. 마당은 물 뿌린 듯 정갈하고 이마가 빨간 학 두 마리가 신선경인 양 소나무 아래 어슬렁거린다. 티없이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다로에 불을 지피다가 이제 막 고개를 돌려 한가롭게 울려 퍼지는 학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잠시 후면 선비는 깨어나 차 한 모금을 찾을 것이다. 글 내용이 "이윽고 산의 샘물을 긷고 솔가지를 주워 / 쓴 차를 달여 마시고 / 마음 가는 대로 글 몇 편을 읽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화가는 하늘이며 마당을 모두 여백으로 깨끗이 비워 놓았다. 선비의 심사가 무욕해서 집 뒤 대나무처럼 속이 비었으니, 맑고 자연스런 여백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청정한 분위기를 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림은 멋도 있어야 한다. 노송의 둥치와 가지 곳곳에 짙은 묵선을 더해 단조로움을 깼고, 뿌리와 가지 끝은 붓질을 짐짓 날카롭게 갈 지之 자로 휘갈겨 마무리했다. 반면 오른편 석벽은 너그러운 붓질이 푸근하다. 선을 모두 물기가 넉넉한 붓으로 힘들이지 않고 쓱쓱 그려 내서 이따금씩 눕는 붓질과 어울려 더욱 편안한 느낌이다. 화제 끝에 찍은 인장은 "필하무일점진筆下無一點塵"이다. "붓 아래 세속의 띠끌 한 점도 없다."

 

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니까.

 

이재관李在寬(1783~1838년 이후)의 호는 소당小塘으로 작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태조 어진을 복원해 감목관을 지냈다. 산수, 인물, 영모, 초상에 모두 능했고 남종화법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1836년 태조 어진이 도둑에 의해 훼손당하자 복원에 참여했을 정도로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 인물화는 소재와 분위기 등에 있어 이인상(1710~1760)과 윤제홍(1764~?)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대담하고 시원스럽다. 수묵은 묵직하고 투박한 듯 하지만 깨끗하고 맑은 담체를 곁들여 여유롭고 높은 정신의 세계를 잘 구현해 냈다. 일본인들이 좋아해 매년 부산에 들어와 작품을 사 갔다고 한다.

 

이 글은 고故 외우畏友 오주석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2. 5. 2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