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송계한담도" 본문
솔 향기 사이로 무엇보다 미쁘고 정다운 벗들의 음성
<이인문, 송계한담도 松溪閑談圖, 조선 19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담채, 24.3×33.6㎝, 국립중앙박물관>
깎아지른 석벽 앞 평평한 냇가에 모처럼 세 벗이 모였다. 두 사람은 앉아 있고 한 사람은 등을 보인 채 옆으로 기댔는데 낙락장송 성근 가지 사이로 솔 향기를 실은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계곡의 턱진 시내에서도 냇바위에 부딪쳐 나는 차가운 물소리가 콸콸하고 쏟아져 내려 듣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준다. 풀벌레 소리 중에 이따금씩 쓰르람쓰르람 하는 쓰르라미 소리가 반갑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쁘고 정다운 소리는 바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펼치는 사랑하는 벗들의 음성이다. '논어'에 "익자삼우 益者三友"라 하였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을 벗하라"는 말이다.
마주 보고 선 두 절벽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절집이 얼비친다. 그나마 아스라하게 머니 이곳은 속세와 인연이 먼 깊은 자연의 속살이다.
<이인문, 송계한담도 松溪閑談圖 부분>
군더더기를 다 떨궈내고 오랜 풍상을 견딘 늠름한 소나무 가지가 이리 비틀 저리 비늘 제 생긴 모양대로 뻗었는데 그 조화는 정교한 글씨를 보는 듯 기막힌 균형을 보여 준다. 이것은 조물주의 서예 솜씨다! 앞쪽에 그려진 각진 바위가 근경近景을 막고 다가서서 오히려 공간의 깊이를 아늑하게 해 준다. 이 바위와 오른편 절벽의 표면 질감은 도끼로 장작을 팼을 때 생긴 단면처럼 보인다. 붓을 뉘여 홱 잡아챈 부벽준斧劈皴이다. 이 도끼 자국 같은 붓질은 먹물이 말라 상큼한 느낌을 준다.
자연 속의 시원한 여름 맛을 한층 살린 것은 소나무와 시내 위쪽을 온통 여백으로 비워 둔 넉넉한에 있다. 그러고 보니 그림은 오른편 위쪽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흐르는 대각선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소나무들의 긴 가지며 절벽에 친 부벽준, 그리고 물결이 모두 이 방향으로 흐른다. 옛 사람의 글쓰기가 세로쓰기여서 같은 방향으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이다. 바위 윤곽선과 틈새의 잡풀을 묘사한 태점 또한 성글게 흩뿌려져 답답하지 않다. 그것은 해맑게 펼쳐 낸 파르스름한 바림 위에 떠서 더욱 깔끔하다.
벗들이 소나무 숲에 앉아 한가롭게 여담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송계한담도 松溪閑談圖>는 이인문 李寅文의 노년작이다. 언제 그렸다는 글씨도 없고 심지어 작가 이름을 적은 관지조차 없지만 이렇듯 칼칼하게 자연의 정수만을 뽑아 그려 낸 화가는 그가 분명하다. 이인문은 키가 크고 깡말랐으며 눈빛이 형형했던 사람이다. 그림은 작가를 닮는다. 환갑이 넘어 건강을 잃었던 동갑 친구 김홍도와는 달리 이인문은 늙을수록 더욱 강건했다고 하는데 팔십 세에 그린 정교한 병풍 그림이 아직도 전한다. 그의 호 가운데 하나는 '고송유수관도인 古松流水觀道人'이다. 여기 그린 '늙은 솔(古松)'과 '흐르는 물(流水)' 역시 작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인문 李寅文(1745~1824년 이후)의 호는 고송유수관도인이며 화원으로 첨사를 지냈다. 김홍도와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이자 그와 함께 당대에 쌍벽을 이룬 화가로 꼽힌다. 산수를 비롯하여 도석인물, 영모 등 다방면에 걸쳐 수준 높은 그림을 그렸다. 특히 고송유수관도인이란 그의 호에 걸맞게 오래된 소나무와 시원한 물줄기를 그린 명품을 많이 남겼다. 이인문의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길이 8미터가 넘는 대작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
이 글은 고故 외우畏友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2. 10. 1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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