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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위상을 둘러싼 계속되는 논쟁, 김해 대성동 고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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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위상을 둘러싼 계속되는 논쟁, 김해 대성동 고분

새샘 2020. 12. 10. 19:02

<김해 대성동 고분군 전경. 왼쪽 아래 타원형 건물은 대성동고분박물관(사진 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333803410000)>

 

전설, 역사가 되다

 

"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

 

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하던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현 부산대 고고학과 명예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애꾸지'가 혹시 '애기 구지봉'을 줄여서 사투리로 부른 말은 아닐까?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구지봉은 가야을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로 적혀 있다.

고대 건국설화의 배경이 된 무대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지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개 마을 이름은 너무 흔해서 무시되기 십상이지만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태곳적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개별 지명의 본래 어원을 규명하는 데 몰입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애꾸지 주변으로 반경 500미터 안에 김해 패총과 고인돌,

대형 독널무덤[독무덤, 옹관묘甕棺墓: 크고 작은 항아리나 독 두 개를 맞붙여서 만든 관]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철은 이곳을 일찌감치 금관가야의 왕릉 후보지로 점찍어놓고 있었다.

조개무지[패총貝塚: 해안이나 강변 등에 살던 선사시대사람들이 버린 조내나 굴 등 껍데기가 쌓여서 무덤처럼 이루어진 유적]

근처에 삼국시대 거점 취락[중심이 되는 대형 주거지]과 주요 고분군이 발견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좋은 땅을 알아보는 눈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김해 대성동 70호분 발굴 현장(사진 출처-출처 자료)>

 

앞선 발굴에서 성과가 저조했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스무 번 넘게 대성동 주변을 드나들며 샅샅이 훑은 끝에 토기 조각을 여러 개 건질 수 있었다.

지표조사로 어느 정도 확신이 선 신경철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경성대 총장을 찾아가 "실패하면 전세 문서라도 내놓겠다"며 발굴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는 초기 발굴 비용에 2천 만원의 예산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앞서 그가 이끈 경성대박물관 발굴단은 1987~1988년 세 차례에 걸쳐 김해 칠산동 고분을 발굴했지만,

부산 복천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유물들만 건졌을 뿐이었다.

가야연맹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의 왕릉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초라한 유물이었다.

지방 사립대의 열악한 재정 여건상 또 헛물을 켠다면 발굴은 곧 중단될 터였다.

 

총장을 설득해 가까스로 재정 지원을 얻어낸 신경철은 김재우(현 경성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심재용

(대성동고분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일규(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우재병(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이해련(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등을 조사원으로 한 발굴단을 현장에 즉시 투입했다.

 

 

고대 한일 교류사의 비밀을 품은 통형 동기

 

<김해 대성동 고분 출토 통형동기(사진 출처-http://egloos.zum.com/nautes3/v/729994)>

 

1990년 6월 마침내 대성동 애꾸지 구릉에서 가장 높은 동남쪽 능선 정상부에 삽을 꽂았다.

주능선에 유력자가, 주변 경사면에 그보다 아래 신분의 인물들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정 아래 

가장 입지가 좋은 장소를 택한 것이다.

당시 이곳은 고추밭 천지였다.

 

그런데 지표에서 1미터도 파지 않은 지점에서 토기 조각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도굴 갱이 발견되어 잠시 절망했지만, 발굴에 착수한 지 3주 만에 그해 7월 하순

3미터 깊이의 흙구덩이 밑에서 통형동기筒形銅器[창자루 끝에 꽂는 의례용 청동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4~5일에 걸쳐 주변 흙을 파내 통형동기를 서서히 노출시킨 뒤 밖으로 꺼냈다.

한국 고고학사에서 통형동기를 발굴해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통형동기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앞쪽 반은 사각형, 뒤쪽 반은 둥근 모양을 이룬 무덤]과 더불어

고대 한일 문화 교류사의 열쇄로 통한다.

이 유물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4세기 중엽 이후부터 출현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긴키[근기近畿: 오사카·고베)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며,

한반도에서는 일본 열도와 가까운 부산·김해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통형동기 상당수도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통형동기는 귀한 편이어서 일본 고훈[고분古墳]시대 수장급首長級[지역 우두머리 계급] 무덤에서 1, 2점 정도 나오는 게

보통이지만 김해 대성동 1호 고분에서는 8점의 통형동기가 한꺼번에 나왔다.

1호분에서 시신은 머리 방향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오른쪽 발치 부근에서 통형동기가 나왔다.

 

통형동기가 한 곳에서 8점이나 나온 데다 함께 출토된 금동 마구, 철제 무기, 그릇받침[기대器臺]의 제작 수준이 매우 높다

사실에 신경철은 흥분했다.

게다가 덧널[목곽木槨: 예전 무덤에서 관과 부장품을 넣기 위해 나무로 만든 시설] 규모는 길이 6미터, 폭 2.3미터에 달했다.

그는 이곳이 거의 20년을 찾아 헤맨 금관가야 왕릉임을 직감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금관가야 분거지인 김해에서 왕릉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가야 무덤에 묻힌 목곽이 썩으면서 봉분도 함몰되기 마련인데,

일본 학자들은 전형적인 고분 모양만 가정해 봉분封墳[무덤 위에 흙을 동글게 쌓아올린 부분]처럼 생긴 것만 찾다보니

눈앞에서 유적을 놓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경철의 발굴 사실을 가장 먼저 접한 한국일보는 1면 머릿기사로 게재했다.

신경철은 "금관가야 왕릉을 처음 찾아냈다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통형동기를 수습하고 나서 그해 8월 하순 함께 고생한 발굴 조사원들과 거하게 술을 마신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가 오랜 기간 금관가야 왕릉을 찾아다닌 이유는 뭘까.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학창 시절부터 김해가 가락국 본거지라는 얘긱를 많이 들었지만

정작 수장급 무덤이라고 할 만한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발견되지 않은 게 늘 의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산대 사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학마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기 위해 답사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한 달 내내 김해 일대를 걸으면서 토기 조각을 모은 적도 있다.

내 손으로 금관가야 왕릉을 꼭 찾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 방침을 밝힌 덕분에 가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높아졌지만,

1990년대까지 가야사 연구는 철저히 학계의 변방에 머물렀다.

신라나 백제, 고구려에 비해 가야의 쇠퇴와 멸말이 빨랐던 탓에 역사 기록이 극히 적은 데다

박정희 정권 이래 신라사 연구에 국가 지원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경향도 있었다.

신경철은 "신라사에 편향되어 있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가야본기」를 일부터 누락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사가 포함되면 초기 신라사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금관가야의 부여 도래설

 

고고학계에서는 발굴 운이 좋으면 연구 실력이 안 따르고, 연구 실력이 좋으면 반대로 발굴 운이 안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신경철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고고학자로 통한다.

그는 화려한 발굴 성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부여에서 건너왔다는 파격 주장을 1992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 출토 오르도스형 청동솥[동복](사진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1115347&memcd=00301732&gb=reporter)>

 

<김해 대성동 출토 도질토기(사진 출처-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70917000104)>

 

1호분 발굴 이후 4개월 만에 찾아낸 29호분(서기 3세기 말 조성)에서

중국 네이멍구[내몽골자치구, 내몽고자치구内蒙古自治區] 고원 지역의 이름을 딴

'오르도스형 청동솥[동복銅鍑: 구리 가마솥]'을 비롯해 도질토기陶質土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단단한 회청색 토기],

순장[사람이 죽었을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로 혹은 자진하여 사람을 함께 묻던일]

북방계 유목민족의 문화 요소가 잇달아 발견된 것이다.

 

1990년 12월에 발굴된 29호분은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유구에 비닐을 씌운 채 조사가 진행되었다.

오르도스형 청동솥은 29호분 바닥에 반쯤 엎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는데, 지표에서 약 70센티미터 깊이에 묻혀 있었다.

 

오르도스형 청동솥은 중국 동북 지방부터 중앙아시아, 이란까지 퍼져 있다는 것이 신경철의 연구 결과다.

남한에서 오르도스형 청동솥은 총 3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김해 지역에서 나왔으며 이중 2점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대상동 29호분 청동솥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면 귀의 단면이 볼록한데

이는 부여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는 중국 지린[길림吉林]성 북부나 헤이룽장[흑룡강黑龍江]성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형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신경철의 부여 도래설에 대해 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북방계 기마민족이 남하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도달했다는 

에가미 나미오 도쿄대 교수의 '기마민족설'의 아류가 아니냐는 시각 때문이었다.

역사학자이고 언론인인 고 천관우 선생도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을 제2의 임나일본부설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그를 일봉의 식민사학자로 취급하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경철은 "에가미 교수와 내 학설은 이동 루트부터 완전히 다르다"고 반박한다.

사실 기마민족설은 학문적 진실성을 차치하고 천황 중심의 극우 사관을 극복하려고 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에가미 교수는 2차 발굴 때인 1991년 3~4월경 대성동 고분 발굴 현장에 직접 찾아왔다.

에가미 교수는 "잃어버린 고리 missing link를 드디어 찾았다"며 자신의 기마민족설이 확인되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경철은 "당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동 루트가 다른데 무슨········'이라는 생각을 품었다"고 말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부여 도래설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청동솥은 부여계로 단정할 수 없고, 대성동에서 나온 고식古式[옛날 방식] 도질토기나 목곽묘와 비슷한 양식이

경주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부여 이동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서기 4세기대 문헌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금관가야 왕릉인 대성동 고분이 중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다.

신경철은 "한일 고대사에서 4세기 역사는 문헌상으로는 공백에 가깝다.

≪삼국사기≫도 5세기 이후의 기록부터 신뢰할 만하다.

따라서 대성동 고분군은 4세기 한반도 고대사 복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 가야의 위상은 실제로 어떠했을까.

아직 신라가 강성해지기 전인 4세기 무렵에는 가야가 신라보다 강성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이 시기 대성동 고분군을 규모나 수준에서 압도하는 유적이 경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 시내 발굴이 일부만 이뤄졌기 때문에 현재 발굴 조사된 자료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이르다는 반론도 있다.

예컨대 경주 쪽샘지구에 갑옷이 들어간 제법 큰 규모의 무덤들 가운데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분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고대 국가로 발돋음했는지에 대해서도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가야사 연구자들은 3세기 말부터 가야가 고대 국가로 이행했으며,

지배층 분열로 인해 5세기경 대성동 고분군 축조가 갑자기 중단되었다고 본다.

이른다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등으로 분열되면서 느슨한 정치연합체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경철은 "경주 황남대총 남쪽 무덤이 고대 국가 단계라면 이에 못지않은 대성동 고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성동 고분 축조가 중단된 직후부터 신라가 두각을 나타냈다고 본다"고 말했다.

4세기에 일본 열도가 제사장이 수장을 겸한 제정일치의 사회였다면,

이 시기에 가야는 다양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전투사회였다는 분석까지 곁들여진다.

그러나 문헌 기록상 금관가야가 532년까지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말기인 6세기 무렵 고분이 뚜렷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오르도스형 청동솥과 더불어 대성동 91호분(4세기 중엽 조성)에서 출토된

중국식 모용선비계 금동金銅[금으로 도금하거나 금박을 입힌 구리] 유물(말 장식, 마구, 허리띠)도 눈길을 끈다.

신경철은 해당 유물의 출토 양이 많지 않고 단발적으로 나오는 출토 양상을 감안할 때 지배층의 이동이라기보다

중국 전연前燕(337~370)과의 교류 과정에서 수입된 물품으로 보고 있다.

 

 

낮은 곳에서 시작해 높은 곳으로 올라간 무덤

 

1차 발굴 때 애꾸지 지명으로 찾아낸 무덤은 구릉 최정상에 위치한 1호분이다.

오르도스형 청동솥이 출토된 29호분은 반대로 가장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이나 유물 양식을 비교 조사한 결과,

가야인들은 낮은 곳에서 시작해 점차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왕릉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가장 아래에 있는 29호분이 1대 왕릉(혹은 수장묘首長墓: 지역 우두머리의 무덤)이고,

1호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릉으로 추정된다.

유물로 본 조성 시기는 29호분이 3세기 말, 1호분이 5세기 초로 분석된다.

첫 삽을 꽂은 상징성과 부장 유물의 학사적 의미 때문에 신경철은 두 고분을 첫손에 꼽는다고 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1990년 1차 발굴이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경성대박물관이 참여한 1~4차 발굴에서는 총 60여 기의 가야 무덤이 조사되었다.

한국의 다른 고대 무덤처럼 이곳도 상당수가 도굴된 뒤였지만,
일부 무덤은 거의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 고고학자들을 들뜨게 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김해 대성동 고분 출토 파형동기巴形銅器[소용돌이 모양의 청동기 장식](사진 출처-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065)>

 

<김해 대성동 고분 출토 갑옷(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writer&logNo=14017881550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김해 대성동 출토 철로 만든 재갈과 말머리 가리개(사진 출처-출처 자료)>

 

<김해 대성동 출토 덩이쇠[철정鐵鋌: 가운데로 갈수록 잘록해지는 간단한 모양의 쇠판](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yju7&logNo=220599108043&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김해 대성동 출토 뚜껑 있는 긴목항아리와 바리 모양 그릇받침(사진 출처-https://feelnews.tistory.com/154)>

 

※출처: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020. 12. 1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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