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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르네상스기에는 외과의에 대한 인기가 높았는데 이는 당시 많았던 전쟁 때문이다.'대 이탈리아 전쟁'이라 부르는 1400년대 말부터 약 60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전쟁터에 화약과 총이 등장해 화상에 의한 외상과 총상을 처치할 외과의가 많이 필요했다.덕분에 외과의들은 외상을 치료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아 외과술이 발달했다.이 시기에 등장한 위대한 외과의는 프랑스의 앙브루아즈 파레 Ambroise Paré (1510?~1590)였다. 파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형편에 도움이 되고자 어릴 때부터 이발사나 외과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외상 처치에 대한 의술을 배웠다.집안 형편상 제2외국어인 라틴어를 배우기가 불가능해 의학 서적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파레는 눈썰미가 뛰어나고 손기술이 ..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은 영조 시대 대표적인 문인화가다.그가 조선 후기 회화사에 남긴 업적은 겸재 정선에 필적할 만하여, 겸재가 진경산수화라는 조선적인 산수화를 창출했다면 관아재는 조선적인 인물화를 개척했다고 평할 수 있다.그럼에도 관아재의 명성이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행적과 명작들이 근래에 와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 등 관아재의 명작들이 속속 소개되고, 손으로 직접 쓴 육필肉筆(정필正筆) 문집인 ≪관아재고觀我齋稿≫와 스케치북인 ≪사재첩麝臍帖≫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회화사상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관아재는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어 이름이 높았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심재沈鋅의 ≪송천필담松泉筆譚≫은 다음과 같이 전..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만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훙산(홍산紅山)문화를 들어보았을 것이다.훙산문화는 중국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다.중국이 훙산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1990년대 이후 중국은 다원일체론에 따라 훙산문화가 중화 문명이 북방 만주 지역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증거라며 널리 홍보하고 있다.그 이전에는 몽골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의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훙산 유적을 조사했다.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전문가들은 훙산문화가 고구려와 밀접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 고대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훙산문화가 선사시대를 둘러싼 국가 간 역사분쟁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훙산문화는 국가가 성립되기 전 옥기玉器 제작과 제사로 문명을 열었다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만주..
14세기와 15세기는 장차 동유럽의 지배 세력이 될 러시아 Russia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유럽의 국민적 군주국가와는 매우 다르게 발전했다. 에스파냐,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러시아는 1500년 무렵에 이르러 유라시아 최대의 다민족 제국으로 향하는 결정적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런 발전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중세 말기의 몇몇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서유럽의 국민적 군주국가들과 나란히,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동유럽 슬라브 Slav(슬라브어 언어를 쓰는 인도유럽인 민족) 국가들이 발달했을 것이다. 제8장에서 보았듯이, 스웨덴의 바이킹 Viking(루스족 Rus으로 알려져 있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Ukraine에서 키예프 공국Principality of Kiev..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그곳에 있던 학자들이 주로 옮겨온 곳은 상대적으로 정치와 종교로부터 독립되어 있던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도시였다.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들자 그곳으로 다른 학자들과 학생들도 몰려들었다. 이렇게 지식의 파도(?)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Università degli studi di Padova(UNIPD)으로 밀려들었다. 근대 해부학의 문을 열었던 벨기에 출신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1514~1564)가 교수로 있었던 곳도 바로 파도바 대학이었다. 베살리우스가 파도바 대학에서 의대 교수가 되기 약 30년 전, 대학 의학부에 두 명의 의대생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였다.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 ≪천체의 회전..
조선시대에는 단짝으로 어울린 화가와 시인이 몇 쌍 있었다.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1714~1759),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연객烟客 허필烟客(1709~1768)은 서로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이들은 한평생을 같이 살며 시와 그림으로 어울렸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가문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겸재보다 위에 있었지만 평생을 벗으로 지내며 서로의 예술에 대해 깊은 신뢰와 존경을 보냈다.한산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정3품 삼척부사까지 올랐지만 그에게 관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사천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무려 1만 3천여 수의 ..
일본이 한국을 다른 나라와 다르게 대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지만 주변국에 대한 태도에 변함이 없는 독일과 비교해보면 일본의 태도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 서구 국가에는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피해 당사지인 한국과 중국에게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한다. 일본의 모순적인 태도 뒤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 사업이 있다. 일본은 자신들을 대륙에서 온 천손天孫민족으로 자처해왔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자신들의 '고향'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한국을 넘어 만주를 거쳐 중국까지 침략하면서 일본 민족의 북방기원설로 이를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기들의 고향인 동시에 열등한 식민통..
왕과 귀족계급 사이의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영어 Old Regime, 구제도舊制度) 동맹은 부분적으로는 흑사병으로 조성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대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전쟁의 산물이자, 전쟁이 중세 말기 국가 발전에 미친 영향력의 산물이었다. 14·15세기에는 유럽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각국 정부는 신민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력과 신민의 삶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을 새롭게 주장했다. 군대 규모는 한층 커졌고 군사 기술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은 더욱 파괴적으로 되었고 사회는 점점 군사화되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의 결과 1500년에 이르러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적인 국가—특히 포르투갈, 에스파냐..
벨기에 출신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1514~1564)는 어릴 때부터 해부를 좋아해 개, 고양이, 쥐 등 주변에 있는 동물들을 가리지 않고 해부하곤 했다. 해부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한 그는 파리 의대에 들어갔지만 크게 실망했다. 의대 교수들이 직접 해부하지 않고 갈레노스 Galenos(영어: 갈렌 Galen)의 책만 구구절절 읽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레노스라는 안경을 끼고 인체를 바라보았다. 간혹 해부 과정에서 갈레노스 이론과 맞지 않는 소견이 발견되어도 그것은 해부 사체만의 특징이라고 무시했다. 답답한 파리 의대 생활은 해부학에 대한 갈증을 더욱 키우기만 하여 베살리우스는 공동묘지에서 사체를 가져다 홀로 해부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U..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산천 경관의 사생寫生에 주력하는 화풍)라는 한국적인 산수화 양식을 확립한 대가이다. 만약 겸재가 없었다면 한국회화사가 어찌 되었을까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겸재는 화가의 천분을 타고나지는 않은 듯, 그의 작품에는 천재적 기질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알려진 겸재의 기년작紀年作(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 가운데 진실로 겸재다운 첫 작품은 59세인 1743년 청하현감 시절에 그린 이다. 이후 모친상을 당하여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원숙한 경지의 진경산수를 그린다. 63세 때의 , 65세 때의 에 이르면 겸재는 한 차원 높은 진경산수의 명작으로 보여준다. 그는 참으로 대기만성의 화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