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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이제부터 이번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전시된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1892)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치는 완당 김정희의 총애를 받았고 오랫동안 완당이 좋아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의 기준작은 헌종憲宗(재위 1834~1849)에게 바쳤던 화첩—지금도 광주 지역에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서울대박물관의 선면산수일 것입니다. 여기 전시된 것은 노필老筆(노련한 글씨)이 많은데 필치가 거칠어져 섬세한 맛이 줄어갑니다. 하여간 소치가 얼마나 완당의 덕을 보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자서전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그 대신 소치는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소치는 완당에게서 청나라 왕잠王岑(1778년 무렵 활동)의 화첩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아직도 소치의 ..
인간의 동물 가죽에 대한 욕망은 고대의 역사를 이끌었다.모피는 온대와 한대 사이의 교역을 이어주는 세계사의 커다란 축이다.고조선은 역사 기록이 소략하여 그 실체와 영역에 대한 논쟁, 그리고 중국과의 역사분쟁의 대상으로 소비되기 일쑤다.그렇기에 고조선에 대한 몇 줄의 기록이 모피 무역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조선은 모피의 공급을 통제하고 조정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와 겨루었다.고조선이 모피로 중국과 교역을 했다는 것은 고조선의 경제활동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모피는 고조선의 역사를 세계 문명사적 보편성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연결고리다. ○조선의 모피는 천금처럼 귀하니 고조선이 중국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관중의 ..
○서론: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 사이의 관계 이론적으로 유럽은 10세기와 11세기에도 군주국가들의 대륙이었다.이 시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왕권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프랑스의 카페 왕조 Capetien dynasty(프랑스어 Capétiens)는 프랑스 전체가 한때 한 명의 왕에게 충성했다는 기억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987년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를 단절 없이 계승했다.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지방 지배자가 카롤링거 왕조가 내려놓은 왕권을 놓고 서로 경쟁했지만, 962년 이후에는 새로이 제위에 오른 독일 황제 오토 1세 Otto I에 의해 압도당하고 말았다.그러나 이탈리아의 오토 왕조도 프랑스의 카페 왕조도 그들이 통치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영역을 실효적으로 ..
일본도 메이지유신 후 서양문물이 들어올 때까지 그림의 주류는 이른바 '남화南畵'라는 전통산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본시 일본에는 서양화의 맥락이 가냘프게나마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장기長崎)에 와 있던 네델란드 교역선을 통해서 들어온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마치 중국에 들어온 낭세령郎世寧(1688~1768) 같은 사람의 서양화풍이 큰 영향을 못 주듯이 일본에서도 '남화'의 주류를 꺾을 수가 없었죠. 물론 이 밖에 사생寫生의 전통과 더불어 '우키요에(부세회浮世繪)'(에도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유행한 판화)라는 시정市井(인가가 모인 곳)의 풍속화 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주류는 '남화'라는 전통 문인화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세력이 밀리면서 졸지에 흔들립니다. 메이지시대는 한 40여 년 가량 지속되는데 처..
고조선古朝鮮(단군조선檀君朝鮮)(서기전 2333~서기전 1세기 무렵)의 뒤를 이어 건국했다고 알려진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자조선(서기전 1100 무렵~서기전 195)은 1000년 넘게 존속했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실체가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기자箕子가 상商나라(서기전 1600 무렵~서기전 1046 무렵)가 멸망할 때 충절을 지킨 3인으로 알려진 기자, 비간比干, 미자微子 중 한 명이었다는 정도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중국 고대 상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기자가 주周나라(서주西周)(서기전 1046~서기전 771)를 피해 동쪽으로 올 때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고조선의 왕으로 책봉했고, 이에 단군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해 기자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사기史記≫ ..
중세 전성기의 엄청난 사회적·경제적 변화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정부와 정치가 등장했다. 중세 초기에는 국왕이나 황제와 같은 1인 군주가 국가원수가 되는 군주정君主政 Monarchy이 서유럽인에게 알려진 유일한 정부 형태였다. 도시는 규모가 작았고 통상 주교나 왕이 지배했다. 왕국 역시 규모가 작았고, 중세 초기에는 롬바르드족 Lombards, 서고트족 Visigoths, 서색슨족 West Saxons, 잘리어 왕조 프랑크족 Salian Dynasty Franks 같은 특정 부족 왕국들에게나 군주정이 적합한 정부 형태로 간주되었다. 8세기와 9세기를 거치면서 이들 부족 왕국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 대신 큰 규모에 강력하고 넓은 영토에 기반을 둔 왕국이 잉글랜드 England와 카롤링거 제국 Caroling..
2023년 9월 4일 미국화학회지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JACS)의 온라인 판에 울산과학기술원(유니스트 UNIST) 화학과 유자형 교수팀과 건국대학교 의과대학 정혜원 교수팀이 노화세포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연구 논문이 실렸다. 이 연구는 미토콘드리아를 표적으로 하는 인공단백질(단량체 monomer)을 체내에 투여하고 미토콘드리아 안으로 침투하면 인공단백질끼리 서로 결합되어 자기조립체(소중합체, 올리고머 oligomer)를 형성하는데, 이 자기조립체가 노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노화세포 미토콘드리아 막이 파괴되어 결국 노화세포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인공단백질인 RGD 펩티드(Arg-Gyl-Asp peptides, 아르지닐글리실아스파르트 ..
그러면 19세기 전반을 지배하던 전통산수와 기타의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술)는 중국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중국은 1840년에 소위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s(청나라와 대영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1차 1840~1842, 2차 1856~1860)이 일어나서 중국은 현실적으로 서양세력에 굴복하였고, 1850년에는 내전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또는 태평천국운동)(1850~1864)이 일어나서, 10여 년 동안 나라가 소란하고 그 영향이 조선사회에까지 ㅇ미쳤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은 서양의 이른바 근대사상을 휩쓸려 들어가게 되는데, 미술에 있어서의 근대사상은 곧 개성적인 것이 가치 기준의 전면에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은 모르는 사이에 개성이 나오게 마련이고, 한 나라의..
동이東夷는 원래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안에서 사용한 명칭이다. 동이족은 주周나라(서주西周: 서기전 1046~서기전 771) 건국 직후 상商나라(서기전 1600 무렵~서기전 1046무렵) 사람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서기전 770~서기전 221)를 거치면서는 산둥반도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통일을 이룬 진한秦漢시대[진秦(서기전 221~서기전 206)과 한漢(서한西漢~동한東漢: 서기전 206~서기 220)]에는 바다 건너 고구려, 부여, 옥저 등 한반도와 북방의 만주족을 통칭해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라는 명칭의 등장과 그 의미 변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중국 문명의 발달 과정, 그리고 서해를 둘러싼 몇천 년 동안의 문화교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근대 이후 제국주의의 발흥..
중세 전성기의 늘어난 부는 유럽의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 10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사회를 '일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전투하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1300년에 이르면 그런 표현은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서유럽의 신흥 도시에는 새로운 상인 엘리트와 전문직 엘리트가 등장했다. 1300년 무렵 유럽 사회의 가장 부유한 구성원은 귀족이 아니라 상인과 금융업자였다. 대귀족 가문은 짐짓 상업을 경멸하는 체했다. 그러나 귀족은 '타산적인 사람들'을 멸시하면서도 점점 상업의 세계로 글려들어갔다. 물론 귀족은 전투를 수행했다. 하지만 기사, 도시민 십자궁수, 농민 장궁수, 시민군, 농민 징집병 등도 전투에 참가했다. 노동 역시 더욱 복잡해졌다. 1300년에 이르러 잉글랜드 농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