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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8장 서론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서유럽 Western Europe, 비잔티움 Byzantium, 이슬람 Isalm 세계의 세력균형은 엄청나게 변했다. 1000년 무렵의 유럽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바이킹 Vikings, 마자르족 Magyars(또는 헝가리인 Hungarians), 무슬림 Muslims에게 군사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서유럽의 도시들은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 어떤 서유럽 도시도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계의 고대 지중해 도시들과 규몾나 세련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서유럽은 면직물, 비단, 향신료, 금을 여전히 비잔티움과 이슬람 상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문학과 학문에서의 불균형은 더욱 컸다. 유럽인은 비잔티움과 이슬람이 고전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풍부한 문화적·지적 유..
조선 말기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 두 사람을 소개한다.한말에 오면 지방에서 활동하는 화가 즉 지방화가들이 나타나게 된다.이는 즉 지방 경제력이 커지면서 그림이 대한 수요가 생기게 되고, 따라서 그 곳에 살면서 그림을 통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출현함을 뜻한다. 첫 번째 소개되는 지방화가는 산수와 인물을 잘 그린 함경도 단천의 겸현謙玄 우상하禹相夏(19세기 중엽~20세기 초)이다.호가 겸현謙玄인 것으로 보아 겸재謙齋 정선과 현재玄齋 심사정을 숭상했던 모양이다.그런데 우상하의 그림은 얼마 없는데, 알려진 것은 3점 정도에 불과하다.하나는 서울대 박물관에 있는 고기 잡는 사람을 그린 로서, 실사實寫 같지만 확실치는 않다.두 번째는 라는 큰 폭의 그림인데, 이것은 완전히 전통식 그..
히프크라테스 Hippocrates(서기전 466~377) 시대 이후에도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로 이어져 꾸준히 발달하던 그리스 의학은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 공화국으로 전해졌다. 로마 귀족들은 의술을 천한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그리스를 포함한 외국 출신 의사들이 환자의 치료를 전담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이 식민지였던 그리스 문화에 감명받아 로마의 정신세계가 오히려 그리스 사상에 압도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반발한 로마 정치가들은 의도적으로 그리스 문화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의학도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물론이다. 로마의 지배계급은 그리스 의사들이 오히려 로마인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리스 의학을 위기에서 구해낸 이가 있었으니..
식인食人 cannibalism(또는 anthropophagy)이라는 것 자체가 상상조차 금기시되다보니 과연 인간의 역사에서 식인이 정말로 존재했는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이어왔다. 특히 19세기까지 제국주의 및 인종주의의 발로로 식인 풍습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의 미개한 행위로 규정지었고, 또 그것을 이유로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그들의 합리화는 '이들은 서로 잡아먹는 악한들이니 절멸시켜 마땅하다'라는 헛된 논리를 심어주는 데 일조했다. 20세기 중반까지 고인류가 식인을 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북경원인北京原人 Beijing Man(또는 베이징원인)이 좋은 예다. 1930년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인골의 뼈들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는데 일부 고고학자들이 이를 서로 ..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 몰락의 비참한 광경은 750년에서 1000년 사이 서유럽에서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비잔티움 Byzantium이나 무슬림 Muslim 세계와 비교할 때 서유럽이 지적·문화적으로 낙후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1000년 무렵이 800년 무렵보다 한층 더 심각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의 어떤 지배자도 비잔티움 황제나 코르도바 Cordoba의 우마이야 칼리프 Umayyad Caliph의 권력에 필적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도 서유럽은 완제품과 사치품을 수입하고 모피·가죽·노예를 수출하는 등 비잔티움과 이슬람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서유럽 사회는 착실하게 점점 ..
조선 말기에 화원이 그린 그림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린 이를 몰라서 아직까지 '작가作家 미상未詳'으로 남아 있는 그림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도鬪犬圖> 또는 猛犬圖>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이 그림 제목을 로, 그리고 다른 명칭으로 라고 기재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은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관련 학계나 전문가들은 거의 작가 미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고희동의 술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은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한 고가古家(지은 지 오래된 집)에서 이 그림을 처음 발견하고서, 우리나라 동양화를 이끌던 선배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
마케도니아 Macedonia(Macedon)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ros III)(재위: 서기전 336~323)은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화려한 헬레니즘 Hellenism 문화를 전파하려 노력했지만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사이에 '서양 삼국지'라 부르는 디아도코이 Diadochoi 전쟁('디아도코이'란 '왕의 후계자'란 뜻으로 '후계자 전쟁'이라고도 부르며,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의 3국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서쪽 영토이던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Ptolemaic dynasty가, 그리고 시리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Seleucid dynasty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2019년 연말에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전세계가 큰 변화를 겪고 있다.21세기의 발달된 기술과 문명으로도 쉽게 막지 못한 이 전염병이 앞으로 인류 역사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고 있다.사실 태곳적부터 인류는 야생동물의 세균과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있었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전염병과 싸워왔다.몇천 년 전 바이러스와 세균의 존재도 모르고 제대로 된 의학도 없었던 고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전염병에 대처하면서 멸종의 길을 피할 수 있었을까.약 5000년 전 네이멍구자치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 치명적인 페스트균(예르시니아 페스티스 Yersinia pestis) 전염병에 대해 지혜를 발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에서 발견된 무더기 인골 2010~12년에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샤를마뉴 제국의 흥기(717~814년) 카를 마르텔, 궁재가 되다 717년 카롤링거 왕조가 메로빙거 왕들과 권력 공유 717~751년 피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다 751년 샤를마뉴, 피핀 계승 768년 샤를마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쓰다 800년 루트비히 경건왕의 황제 즉위 813년 샤를마뉴 사망 814년 갈리아 Gaul에 자리 잡은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Dynasty의 취약성은 7세기 말에 접어들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Dynasty의 중심지인 네우스트리아 Neustria('새로운 땅'이란 뜻이며, 오늘날 프랑스 북부 지역으로 메로빙거 프랑크 왕국 Frankish Kingdom의 서부 지역)의 귀족 가문과 변경 지역인 아우스트라시아 Aust..
심전心田안중식安中植(1861~1919)은 1881년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製圖士로 조석진과 더불어 중국으로 가서 1년 동안 머물었는데, 이때 알게된 조석진과는 평생 친구로 사귀면서 당시 조선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다.1896년 국가미술기관이었던 도화서는 실질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1902년 어진도사御眞圖寫(임금 초상화를 그리는 화원)로 조석진과 함께 임명되었고, 이후 자신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조선이 망해가던 시기에 활동했던 안중식은 '고종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궁중화가였다. 1911년 왕실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조석진, 김응원 등과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서화미술원 출신이 광복 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