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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한말 최대의 화가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도 손꼽을 수 있는 화가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이다. 오원이란 호는 단원과 혜원을 의식해서 "나(오吾)도 원園이다"라고 하면서 장승업 자신이 지었다고 하다.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고 해서 거의 그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는데 다만, 초상 같은 전신 그림은 전하는 것이 없다. 오원에 대해서는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일사유사逸士遺事≫에 일화가 실려 있다. 이 책은 동시대 사람의 기록이니 믿을 만하다. 오원을 술을 좋아하면서 아주 자유분방해서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대로 그려주지 않았다고 되어 있지만 비교적 오원 그림은 현재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오원은 소위 불해문자不解文字라고 해서 글자를 몰라 다..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대개 미개한 원시인이 돌을 깨며 사는 무지몽매한 삶을 떠올린다. 하지만 고고학이 밝힌 구석기시대 사람들을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인간의 지혜를 발휘해 적자생존의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흔히 문명이 등장한 이후 과학기술에 기반해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현재까지를 인류의 가장 급진적인 변화의 시기로 착각할 수 있지만, 600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정작 지난 3만 년 동안만 유일하게 뇌의 크기 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한편 문명이라고 하면 토기를 사용하며 마을을 일군 신석기시대를 거쳐 거대한 신전과 도시를 세우고, 글자를 사용한 5천 년 전의 4대 문명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결코 아니다. 문명은 후기구석기시대 현생인류(슬기사람,..
3부 중세 서론 '중세 Middle Ages'라는 말은 17세기 유럽인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영광스런 성취와 자신들이 살던 근대 Modern Ages 사이에 놓여 있다고 간주한, 길고도 암울한 단절의 시기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이 말은 너무나 널리 사용되고 있어서 바꿀 수 없는 역사 술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진지한 역사가도 예전처럼 중세라는 말을 경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세―대략 600년에서 1500년 사이―야말로 세 서양 문명의 문화적·정치적·종교적 토대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600년에서 1500년까지의 시기는 유럽 문명에 관한 한 진정한 의미의 '중세'였다. 이슬람 세계에서 이 시기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고 팽창하고 성..
1961년 지금의 강동구 명일동에서 고려대 김정학 교수는 청동기시대 집터를 발굴했다. 2015년 기준으로 보면 55년 전이었는데, 이 발굴이 서울 지역 최초의 발굴이었다. 당시 김정학은 발굴 허가가 나오기 전까지 유적을 지키고자 열흘 동안 학생들로 하여금 이 발굴 지역을 교대로 지키게 했다고 한다. 서울 발굴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은 서기전 18년 백제가 건국하면서 한 나라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여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이르러 '서울 역사 2천 년'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전에 사용하던 '서울 정도定都 600년'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도로서 서울의 역사가 600년에서 2천 년으로 확장될 ..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이름이 친숙하게 알려진 조선왕조 말의 도화서 화원들로는 임당琳塘 백은배白殷培(1820~?),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 운계雲溪 조중묵趙重默(?~?), 해사海士 안건영安建榮(1841~1877),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 그리고 마지막 화원으로서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중에는 꽤 역량이 있는 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해사 안건영은 상당히 실력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지금 전하는 그림에는 그의 대표작이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혜산 유숙, 오원 장승업,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등은 좋은 작품들이 현존하..
지금까지 1961년부터 2015년까지 과거 55년 동안 서울 지역에서 실시된 발굴 내용을 시기에 따라 살펴보았다.이런 방법은 서울의 도시화와 맞물려 그 변화상을 이해하기에 더 적절하고 서울 역사와 문화의 특성을 좀더 선명히 보여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이에 각 연대별로 실시된 발굴조사의 특징을 규정하고, 연대별 대표 유적들도 선정하여 보았다. 또한 발굴된 유적을 흥미로운 유적, 보고 싶은 유적, 그리고 버리고 싶은 유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는데, 이런 구분 방법은 서울 발굴의 명암을 그대로 보여준다.발굴 조사 이후 각각의 유적들은 발굴 결과에 따라 없어지거나, 복원을 하거나, 새롭게 고쳐진다.이러한 결과가 지금 서울에 존재하는 유적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발굴보고서에만 있고 실제로 남아 있지 않아 보..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로마 제국 부흥(527~568년)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시작 527년 공표 529~534년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정복 533년 이탈리아 재정복 536년 고트족 마지막 전진기지 격파 563년 지중해 세계 지배 563~565년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565년 롬바르드족의 북이탈리아 정복 568년 524년 보이티우스 Boethius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Theodericus 대왕에게 처형당한 것은 여러 면에서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보이티우스는 탁월한 철학자이자 세련된 라틴어 문장가였다. 서유럽은 보이티우스만 한 철학자와 문장가를 향후 몇 백 년 동안 배출하지 못했다. 또한 보이티우스는 평신도였는데, 이는 보이티우스 이후 몇 백 년 동안 서유럽의 거의 모든 저술가가 사제 또는 수..
한말 또 한 가지 특징 있는 그림을 그린 서화가로 당시 일호一濠 남계우南啓宇(1811~1888)를 들 수 있다. 남계우는 숙종대의 문신 남구만南九萬의 5대 손으로, 정3품의 벼슬을 지낸 문인이었다. 그는 산수화도 잘 그렸으나 평생 나비와 꽃 그림을 즐겨 그린 조선시대 나비 그림의 제1인자로서 남나비(남접南蝶)라고 불렸다. 이 그림은 꽃과 나비를 그린 이다. 세로로 긴 화폭에 그린 이 그림에는 세밀한 필치로 그린 다양한 색의 나비들이 역시 다양한 색의 꽃(붉은 모란, 흰 모란, 푸른 붓꽃 등) 위에서 어우러져 노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나비마다 종류나 묘사가 조금씩 다 다르며, 날아오르거나 꽃에 앉아 날개짓하고 있는 나비의 자태를 보면 상당히 사실적인 묘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정확성과 노력으로..
3년4개월 만에 과학으로 극복한 코로나…대한민국의 현주소는? 백신으로 1980만명 목숨 구해 미·중 앞다퉈 바이오 개발 경쟁 한국, 가장 낮은 사망률 보였지만 과학 대신 의료진 희생 의존 mRNA 의료기술 예산 105억원 '태부족' '1192일' 세계보건기구(WHO)가 2020년 1월 30일 '코로나19 국제공중보건비상사태 Public Health Emergency of International Concern(PHEIC)'를 선언한 뒤, 지난 5월 5일 이 비상상태를 해제함으로써 전 세계가 어둡고 긴 코로나19 팬데믹을 벗어나기까지 걸린 3년 4개월 동안의 날짜이다. 이로써 이 질병은 공식적으로 독감 같은 ‘상시 유행 감염병’이 됐다. 3년 넘게 전쟁을 치른 세계에 ‘일상’을 되찾아준 것은 다름아닌 ‘과..
유적에도 사람처럼 운명이 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나 발굴보고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각 유적들도 운명이 있는 듯하다. 지금은 문화재청에서 각 발굴 유적의 운명을 결정한다. 순수한 학술발굴이 아닌 사업을 위한 구제발굴 이후 문화재청은 발굴 결과와 유적의 가치에 따라 '그대로 사업시행', '안내판 설치', '이전 복원', '원형보존' 등으로 유적의 운명을 정한다. '그대로 사업시행'은 발굴보고서로만 남고 유적은 그대로 그 자리에 묻히는 것이고, '안내판 설치'는 원래의 사업은 그대로 진행되면서 그 자리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그 역사적 가치 등만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로 사업시행'이나 '안내판 설치'의 두 조치가 취해지는 유적은 결국 사라져버리는 운명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이전 복원'은 유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