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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통계청에서는 2003년부터 해마다 10월 2일 '노인의 날'에 맞추어 고령인구, 고령화 속도, 자산․부채, 경제활동 상태, 소득분배 및 의식변화 등 고령자 관련 통계를 수집·정리하여 고령자 통계>를 작성하여 9월 하순에 발표하고 있다. 고령자 통계는 65세 이상 인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관련 정부기관별 통계 특성에 따라 고령자 나이 기준에 차이가 있다.즉 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인권실태 조사'와 질병관리청의 '코로나19 확진환자 발생현황'은 60세 이상, 그리고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OECD의 '상대적 빈곤율'은 66세 이상을 고령자로 분류하고 있다. ○고령 인구 비중 2022년 현재 고령인구는 901만 8천 명[남자 393만 3천 명(43.7%), 여자 508만 명(56...
○고전 문화의 그리스도교화 앞서 보았듯이 고대 말기의 그리스도교 지식인 가운데 고전적 전통을 버리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고전적 전통은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전적 전통은 철저히 이교적이었고, 황제가 공식적인 그리스도교도가 된 뒤부터 이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고전 학문은 또한 혼합주의와 연관되어 있었다. 혼합주의란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믿음을 함께 받아들이는 태도로서 4세기 귀족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리스도교도 지식인들은 고전 문학과 철학의 유혹적인 매력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는 심판의 날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키케로의 제자로 판단할까 걱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摩尼敎 Manich..
완당 김정희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은 한말 서화가 여섯 사람—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련,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운미 민영익— 중 마지막 여섯 번째는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서 조선 말기 정치인이었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다.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부친 민태호와 숙부 민규호의 가학을 이은 민영익은 15세 무렵부터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그리고 1878년 왕실 외척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초기에 김정희 제자인 허련을 자택에 머물게 하는 등 특히 추사파 서화가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그 결과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이런 추사파와의 직간접적인 인연은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갑신정변 후 상해에 정착했을 때, 민영익이 오창석, 포화蒲華, 서..
서울에서는 다양하고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각 유적들은 그 가치는 물론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에 발굴된 유적 가운데 재미있고 흥미로운 유적, 발굴은 했으나 지금은 없어져 버려 보고 싶은 유적, 그리고 발굴하여 지금은 복원이 되었지만 보고 싶지 않은 유적·버리고 싶은 유적으로 나누어 그 내용들을 알아보자. 조선 개국 공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선생(1342~1398)의 묘가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1989년 발굴조사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발굴 중 하나이다. 봉화 정씨 문헌공파文憲公派에서는 그동안 정도전의 묘로 전해오는 묘를 발굴하였다. 발굴 대상 묘는 총 3기로 이 중 제1호분으로 이름 지은 묘가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발굴단도 제1호분이 정도전의 묘일 가..
4~6세기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의 형성 성 히에로니무스, 히브리어·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 340년경~420년 성 암브로시우스, 종교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자율권 확대 340년경~3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신국≫ 등 저술 354~430년 보이티우스, 고전사상과 중세사상의 가교를 놓다 480~524년 카시오도루스, 수도사의 고전 문헌 연구 및 필사 옹호 490년경~583년경 4세기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서양의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그로부터 800년 동안 세계를 주도하게 될 신학 사상을 만들어냈다. 정치적 쇠퇴와 신학적 발전의 동시 발생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자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고전기의 유산이 소멸되고 있으며, 신은 세상을 일시적인 시험장소로밖에 여..
완당 김정희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은 한말 서화가 여섯 사람—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련,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운미 민영익— 중 다섯 번째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대원군이란 칭호는 조선시대에 왕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종친 가운데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친아버지를 일컫는다) 이하응李昰應(1820~1898)으로, 대원군 하면 난초로 유명하다. 김정희와 대원군은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게 된 것은 추사가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지금의 서울 용산인 강상에 머문 첫해로서 당시 추사는 64세, 대원군은 30세였다.이 당시 이하응은 아직 대원군이 되지 못하고 파락호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받고 있어 위장하고 다닐 때였다.대원군은 영조의 현손..
그동안 서울 지역에서 이루어진 유적 발굴 내용을 발굴 시기별로 정리해서 살펴보자. 서울의 유적 발굴을 10년 간격으로 시대별로 특징 짓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는 '순수 발굴의 시대', 1970년대는 '도시화의 시작과 함께', 1980년대는 '복원을 위한 발굴시대', 1990년대는 '구제발굴의 전성시대', 그리고 2000년 이후는 '발굴을 위한 발굴'이었다. 이런 시대별 발굴 특징은 서울의 도시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기별 도시 특성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관련하여 각 시기를 대표하는 발굴 유적을 선정하여 그 특성과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960년대의 대표 유적은 선사시대 유적들을 꼽을 수 있다. 이 시대는 본격적인 도시화 이전으로 고고학자들이 주로 발굴을 실시했다. ..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을 내부에서 변화시키는 동안 제국은 변경 밖에서 밀어닥친 세로운 압력에 직면했다. 3세기와 4세기 동안 페르시아 Persia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로마 제국은 동부 변경에 고비용의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동부에서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려면 로마 제국은 서부에 주둔해야 할 병력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 이런 병력 감축 결과 서로마 제국은 3세기 중반 게르만족 Germanic peoples에게서 파상적인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4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평화로웠고, 제국은 농업적·상업적으로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5세기 초에 들어 게르만족의 새로운 파상 공격이 제국 서반부를 놀라우리만큼 신속하게 휩쓸었다. 이런 파괴의 ..
완당 김정희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은 한말 서화가 여섯 사람—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련,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운미 민영익— 중 네 번째인 이재관이 그린 . 자는 원강元綱, 호는 소당小塘인 이재관李在寬(1783∼1837)은 도화서 화원이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 壺山外史≫에 그림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재주로 자가自家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의 화풍은 이인상이나 윤제홍의 면모를 보이고 있고, 그림에 추사의 발문도 있어 화원이면서도 남종 문인화의 세계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초, 초충(풀과 곤충), 물고기를 잘 그렸고, 특히 영모화翎毛畫(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재관이 원나라 황공망의 대표 산수화 를 본따 천지석벽과 황산괴송을 ..
중랑구 지역에서는 택지개발지구와 재건축사업 부지, 망우동 분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먼저, 2007년에 신내동 694-30번지 일대의 신내2지구 택지개발사업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3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은 해발 160.1m인 봉화산의 북동사면에서 이어져 남동으로 발달한 해발 50m 내외의 낮고 평탄한 구릉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내용을 살펴보면, 조사지역은 주로 조선시대 분묘가 조성되었던 곳으로 분묘 유구는 회묘灰墓(무덤구덩이 안에 석회층을 만들어 관과 곽을 안치하는 회곽묘灰槨墓와 회격묘灰隔墓, 그리고 다른 형태로 석회를 사용한 묘 등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 125기, 널무덤 93기 등 총 218기가 확인되었다. 특히 회묘는 일반적인 회곽묘, 뚜껑만 회로 조성한 것, 보강토에 회와 마사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