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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중세 전성기의 종교적·지적 변화는 유럽인의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유럽 문명의 근본 성격이 이 결정적인 시기에 일어난 변화로 인해 영구히 변화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종교생활의 경우 이 시기에 교황청이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지배적인 조직으로 등장했고, 교회는 평신도에게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확대 및 강화시키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교구 교회가 전 유럽에 걸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고 새로운 수도 교단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일차적 목표는 수도원 바깥의 세상이 기여하는 것이었다. 로마 말기 이래 처음으로 설교, 고해, 순례, 기도가 유럽 그리스도교도의 종교생활에서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새로운 양상은 그리스도교도와 비그리스도교도 사이의 종교적·사회적 구분을..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어머니로 강릉에서 나고 자라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했다.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뛰어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현행 오만 원권 지폐의 초상이기도 하다. 사임당이란 호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사임당의 는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명화로 꼽히고 있다. 율곡은 어머니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짓기에 능하고 농필弄筆(희롱조로 지은 글)을 잘하며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치 않은 것이 없었다.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렸고 초충, 영모, 포도를 잘 그려 세상에 적수가 없었다."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초충도 화..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진다. 온돌방은 한국이 개발하고 보급한 대표적인 난방 시스템이다. 온돌은 서기전 4세기 무렵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룬 옥저인沃沮人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불을 땐 뒤 그 열기를 방바닥으로 보내 열효율을 높이는 방식인 온돌을 개발했다.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지혜가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옥저인들의 생활의 지혜는 곧바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확산되었고, 서기전 1세기 무렵에는 남한 일대까지 전파되었다. 남해안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늑도에서 발견된 온돌이 이를 실증한다. 방바닥을 통해 열기를 전달하는 온돌과 비슷한 구조는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
◎독일의 봉건 군주국가 중세 전성기 독일 Deutschland(영어 Germany)은 매우 다른 발전 과정을 겪었다. 1050년의 독일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국이었다. 수많은 반半자치적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독일 황제는 카롤링거 Carolingus(또는 Karolinger) 식 기반—교회와의 긴밀한 동맹, 신성한 왕권의 전통, 동쪽 슬라브 Slavic 영토 정복의 높은 수익성 따위—위에서 강력한 군주국을 만들었다. 스위스 Switzerland(Swiss Confederation), 동부 프랑스 Eastern France, 저지대 지방, 북부 이탈리아 Northern Italia(영어 Italy) 등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황제들은 교회와의 제후에 크게 의존했다. 왕가의 주요 행..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술)로는 조선조 제일이라 평가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이지만 일자무식에 글도 익힌 일이 없습니다. 술이 대단하고 성품이 소탈해서 수없이 일화를 남긴 사람이죠. 실경을 스케치하러 다닌 일도 없고,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 에게 배웠다지만 제대로 배운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대감들 집에 식객으로 다니면서 중국 그림—그것도 안 본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고화古畫(옛 그림), 화본畵本(그림 배울 때 보고 베끼는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 보통인데 엄청난 천부天賦(태어날 때부터 지님)라 준법皴法(산악·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기법), 수법樹法(나무 그리는 방법), 토파土坡(흙으로 쌓아 올린 둑), 인물, 화조花鳥(꽃과 새 그림), 기명절지器..
우리 고대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신라와 흉노의 관계다.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지만 삼국 가운데 북방과 서역의 유물,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신라와 북방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신라와 북방과의 관계는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중국 고대의 기록에도 신라 이전인 진한 시절부터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중국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많다고 했다.중국 북방 이주민의 흔적은 최근 고고학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신라인들은 그로부터 400~500년이 지난 뒤인 마립간 시기에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북방계 유물과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었다.신라가 통일할 무렵에는 묘비명에 자신들이 중국 서북 지역에 살던 흉노의 후예라고 당당히 적어 북방..
카페 왕가의 주요 왕들(987~1328년) 위그 카페 987~996년 루이 6세 1108~1137년 루이 7세 1137~1180년 필리프 2세(필리프 아우구스투스) 1179~1223년 루이 8세 1223~1226년 루이 9세 1226~1270년 필리프 4세 1285~1314년 ○프랑스의 봉건 군주국가 프랑스의 왕권은 잉글랜드보다 훨씬 늦게 발달했지만, 1300년대에 이르면 두 나라는 서로 견줄만한 수준에 도달했다. 10세기를 지나면서 프랑스 지방 정부의 카롤링거 Carolingus(또는 Karolinger) 제도는 대부분 붕괴되었다. 그 결과 새로 등장한 카페 왕조 Capetian dynasty(987~1328)의 프랑스 왕들은 그러한 제도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거의 200년 동안 카..
석파石坡, 곧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많은 감상가들을 골탕 먹이는 분입니다.대원군의 난초 즉 석파란石坡蘭은 그 진부眞否(진짜와 가짜)를 가리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기준작의 문제가 더욱 중요해집니다.석파는 본래 춘란春蘭(2~4월 봄에 꽃 피는 난, 보춘화報春花, 학명 Cymbidium goerngii: 중국 춘란을 으뜸으로 치며, 한국 춘란은 한반도 남부, ,다도해, 제주도, 울릉도 등에 자생)으로 유명했고, 다음에 나오는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건란建蘭[7~9월 여름에 꽃 피는 하란夏蘭이나 9~10월 가을에 꽃 피는 추란秋蘭, 학명 Cymbidium ensifolium: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푸젠성)에 자생하여 붙은 이름]으로 이름을 떨칩니다.석파는 불우할 때 ..
우리는 역사책이나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 조상이나 고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한다. 이런 모습들은 대체로 빈약한 자료에 상상을 더해 묘사한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 모습은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세계사의 첫 쪽을 펴면 원숭이와 비슷한 털복숭이 모습을 하고 손에 돌도끼를 든 유인원을 만날 것이다. 반면 자기 나라의 역사나 신화의 첫 쪽을 펴면 원시인 대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이나 산신령 또는 제우스 같은 성스러운 모습이 등장한다. 똑같은 원시시대의 조상이 이렇게 정반대로 그려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고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은 신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은 괴수나 짐승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고조선시대라면 산신령 같은 모습의 단군과..
노르만 및 앙주 왕가의 주요 왕들(1066~1327년) 윌리엄 1세(정복왕) 1066~1087년 헨리 1세 1100~1135년 스티븐 1135~1154년 헨리 2세 1154~1189년 리처드 1세(사자심왕) 1189~1199년 존 1199~1216년 헨리 3세 1216~1272년 에드워드 1세 1272~1307년 에드워드 2세 1307~1327년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봉건제는 잉글랜드 England에서 처음으로 절서정연하고 계서제階序制(오늘날의 관료제도처럼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권한의 서열이 결정되는 체제)적인 토지 보유 및 군사적 봉사 체계로서 등장했다. 그것은 1066년의 노르만 Norman 정복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10세기와 11세기 잉글랜드는 서유럽에서 가장 ..